우울증 약을 처음 먹기 시작한 후로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남자친구는 내가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내 말만 다다다 늘어놓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자기 말을 끝까지 듣고 대답을 해주고, 감정기복이 예전보다 덜 하고, 표정도 밝아졌다고 했다.
일주일치 약을 다 먹고서 오늘 병원을 또 가는데 처음에 힘들었던거랑 다르게 두번째는 그냥 아무생각도 부담도 없었다. 오늘은 대기실에 있는 동안 주변풍경도 좀 눈에 들어왔고 대기실에 틀어놓은 TV소리도 잘 들렸다.
집에 오면서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약을 먹기 전의 나는 어땠지? 남자친구는 아주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근데 그런 생각은 있다. 아니 도대체 예전의 나는... 왜 그렇게 24시간 쉼없이 부정적인 미래를 미리 결정지어놓고 괴로워하며 살았지?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내일 불행이 다가오든말든 일단 오늘의 나는 상관없는거였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게 달라진 점이겠지? 예전의 나는 정말 어떻게 그런 정신머리로 버텨온걸까. 의사한테도 말했던 이야기지만 나는 어릴때부터 쭉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살아왔다. 맨 처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6살때부터 병원을 다녔다면 좀 더 나은 내가 되어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후회같은 것도 이젠 금방 사그라든다. 어쨌든 기어코 여기까지 살아냈다. 사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내 인생이 갑자기 활짝 필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래봤자 사회의 가시밭길을 예전보다는 좀 더 잘 견뎌내는 사람이 되는 것 뿐이다.
약을 먹고나면 울적해지거나 눈물이 나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최근에 자기전에 잠깐 눈물이 난 적이 있다. 그러면 그냥 생각을 멈추고 자는 것에 집중했다. 예전엔 잠에 집중한다는 것이 뭔지 이해가 안갔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잊고 산 기능을 하나 되찾은 기분이다. 싫으면 더이상 생각 안해도 되는 기능. 지금까지 30년을 넘게 살면서 그걸 할 줄 몰라서 싫은 기억도 매일매일 데리고 살았어야 하는데.
병원에 좀 더 일찍 다녔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나 보살핌이라는 것은 늘 여유에서 나오기 때문에 너무 나무라지 말고 어느정도는 참작해주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과거의 악몽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감이 있었는데 약을 먹고 나니까 그런거 다 귀찮아서 내팽겨치고 싶어졌다. 이제 니네 갈길 가고 알아서들 살아. 다 귀찮고 귀찮다. 나만 생각하기에도 귀찮을 지경이다. 왜 다른 사람들은 대충 사는데도 멀쩡하지 싶었는데 이런 귀찮은 마음이었구나. 해야할 것만 하고, 너무 많은 걱정을 하지 말고, 좋은 것을 행운처럼 여기고.
나는 유난히 발달도 학업도 다 남들보다 늦으면서 살아왔고 그 점이 조금은 부끄럽고 비참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동안 어떻게 그런 악조건에서도 버티고 살아왔나 신기하다. 뚜벅뚜벅 나에 인생...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이제 놀랄 정도로 흐릿해졌다. 예전엔 늘 발목에 어두운 물이 찰랑찰랑 하는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헷까닥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은 그냥 예쁜 새 신발을 사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오늘 비가 아주아주 많이 내렸는데도 빗물이 튀는 것도 후텁지근한것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산을 쓰고 좀 더 걸어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민트색 우산 속에서 빗소리를 듣는데, 빗방울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정신차리고 걷는다는 어떤 시를 오늘에서야 완전히, 깊이깊이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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